파과를 전개하는 구병모는
유려하고 우회한 묘사로 인생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무심코 집어들어 읽어 본 나같은 한심한 독자마저도
읽는 내내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자기반영을 하게 만들어 성실한 독자로 길러낸 것을 보면
장인이 확실하다.
222p는 읽고 한동안 다음 페이지를 읽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는데 그 파과인 복숭아에 투영되는 인생살이와
또한 그 복숭아가
나이가 들고 '어느 날'이 되는
어느 날. 모든 상실을 살아낼 적에 보게 될 나 자신일 듯 하여
그저 막막해 지는 것이다.
-222p-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100p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들을 잊고 긴장이 풀린 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피비린내를 세척할 것만 같던 소독약과 스킨 섞인 독특한 냄새를, 한 폭 주단과도 같던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사리사리 얽히며 피어오른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 나온 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102p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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