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 외롭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만
걸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벗들은 고향땅을 떠난지 오래고
그 고향땅에 나는 남았다
언젠간
나도 떠나겠지만.
구태여 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여름밤의 토요일이다
두부를 데쳐 한쪽에 놓았다
종지에 간장. 물. 식초. 마늘. 고추. 깨. 참기름. 아가베시럽을
넣어 휘저었다
유리병에 얼음을 넣고 물과 술을 붓고
레몬을 짜넣었다
잔엔 블루베리와 레몬을 가득 담았다
상큼하고 무거운 술을 들이키니
말미에 찐득하게 으스러지는 블루베리가 달콤하다
헛웃음이 난다
미등을 켜고 조원선의 노래를 틀었다
마침 비가 온다
하루가 막막했다
이유를 찾으려 종일 애썼는데
이 시간까지 찾지를 못했다
시절 속 연인 때문인가
해풍 같은 청춘 때문인가
그리운 이가 있어도 그는 오늘 얼굴이 없고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도 오늘은
물에 젖은 솜뭉치의 무게일뿐이다
침대옆에 쌓아놓은 책더미를 휘젓었다
이응준의 책을 어렵사리 꺼내느라
손에 상처가 났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접어놓는 버릇이 있다
스무페이지 정도의 줄거리를 요약한 듯
빛나는 페이지들은 무의식적으로 귀퉁이 한 곳을 접어놓고
이런 날 가끔
친구에게 전화를 걸 듯 찾아 읽는데.
그의 소설 중 옴니버스 몇편으로 된 장편이 하나 있다.
그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여행의 두페이지
적어놓아야지.
149p
[ 뭍으로 잡혀온 헐떡거리는 인간의 아가미는 정신이 몽롱하다.
겨우 거울 앞에 서본다.
육체는 한 껏 부풀어 있으나, 역시 알고 보면
생선가시보다 미약한 나.
이 끝 모를 불안의 껍데기를 어찌하랴.
그 안에서 사랑을 하고 싶다.
수음이나 아편처럼 초라하고 비루한 사랑이라도 좋다.
생각이 거기에 미칠 즈음이면, 예기치 않은 졸음이 밀려든다.
시퍼런 칼날 같은 새벽잠,
애처로운 축복이었다.]
264p
[나는 심판을 재촉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제 살을 파먹는 구더기의 가련한 미래를 위해서 왔다.
정육점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의 원한을 위해서 왔다.
교만한 장미에게 무시당하는 잡초와 선인장의 목마름을 위해서 왔다.
...
빛의 상실, 그것이 별의 사망이다.
신의 상실, 그것이 인간의 죽음이다.
어둠은 별들의 무덤이자 자궁이다.
...
인간은 어둠의 의미를 와해하고 부활을 포기했다.
너무 캄캄하고 쓸쓸해서 결코 돌아올 일이 없는 나라를,
불모의 금 간 더러운 스모그를 보금자리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바람 부는 언덕에 기괴한 단두대를 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사막과 호수를 구별하지 못하는 눈뜬 맹인들의 손바닥에 빛나는 눈동자 두 개를 쥐여주려고 왔다.]